아, 쉽게 쓰여진 시
조약돌
조약돌은 정의하기에 쉬운 사물이 아니다.
단순한 묘사로 만족한다면 우리는 우선 조약돌이 바위와 자갈 사이의 돌의 형태나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이미 돌에 대해서 증명되어야 하는 하나의 개념을 의미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 노아의 홍수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나를 비판하지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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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바위덩이들은 엄청나게 큰 하나의 선조로부터 분열되어 나왔다. 전설적인 이 몸체에 대해 한가지밖에 말할 수 없다. 저 세상을 벗어나면 허황한 얘기라는 것이다.
최후의 끈적끈적한 솟구침 사이에 무정형으로 퍼져 있는 그것을 이성이 잡는다. 이성은 세상만한 크기의 영웅의 세례식을 위해 잠을 깨고 죽음의 침상의 무시무시한 반죽통을 발견한다.
여기서 독자는 너무 빨리 지나치지 말아야 하고, 두껍고 음울한 표현 대신에 그 표현들을 조금이라도 투명하게 해주고 그 표현들로 완전히 흐려지지 않을 수 있는 진리의 위대함과 영광을 찬미해야 한다.
이처럼, 이미 광채를 잃고 차가운 위성 위에 지금은 태양이 빛난다. 그를 향해서 타오르던 어떤 위성도 더 이상 속이지 않는다. 모든 영광과 모든 삶, 보게 해주고, 살게 해주는 객관적 외양의 모든 원천이 태양에게로 되돌아갔다. 그로부터 나와서 그의 주변을 맴돌던 영웅들은 스스로 빛을 잃었다. 그들이 그 근원 자체를 위하여 그 영광을 마다하는 진리가 관중과 또 죽어버렸거나 죽어 가는 대상들을 유지하도록, 그들은 진리 주위를 맴돌고, 관객의 역할을 하기를 계속한다.
그런 희생, 이전에 그토록 영광스럽고 뜨겁던 자연 밖으로의 생명의 축출이 드라마틱한 내적 전복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에 우리의 소박하고도 멋진 거주지 지구의 회색 빛 혼돈의 기원이 있다.
이처럼, 이불 밑에서 요동치며 잠자는 육체와 같은 비틀림과 기복의 기간이 지난 후에 엄청난 구속의 힘에 의한 것처럼 자신의 의식에 굴복당한 우리의 영웅은 점점 더 드물어지는 내적 폭발로 점점 더 무거워지고 차거워지는 껍질을 부술 뿐이다.
죽어버린 영웅과 혼돈스런 지구가 오늘날 뒤섞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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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하는 능력과 더불어 하나의 온전한 개체로 다시 만들어지는 능력을 영원히 잃어버린 이 몸으로부터, 냉각의 느린 재앙 이래로 역사는 영속적인 붕괴의 역사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때 다른 일들이 벌어진다. 위대함은 죽어버렸고, 생명은 위대함과는 전연 상관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내 수많은 자원으로.
그런 것이 오늘날 지구의 겉모양이다. 세계만한 크기의 존재의 조각난 시체는 그보다 더 작고 더 덧없는 수없이 많은 존재들의 생명에 장식으로 쓰일 뿐이다. 그 무리들은 곳에 따라 너무 밀집해 있어서 자신들의 유일한 지주 역할을 해온 성스런 뼈대를 완전히 가린다. 그때부터 돌의 밀도를 본따는 데 성공하여 그 시체들에게 바위에 조금도 의지하지 않고 식물성 토양이라는 것을 통해 스스로 자신들을 복제하게 하는 것은 그 시체의 무한함이다.
게다가 내가 지금 다루고 있는 것만큼이나 오래 된 기원의 액체적 요소들은 상당히 넓은 지역에서 결합하여 그것을 덮고, 스치고, 계속적인 타격으로 그것의 침식을 활성화한다.
그래서 나는 산재하고 있고, 세상에 의해 천대받는 돌이 우리 눈에 보여주는 몇몇 형태들을 묘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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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으로나 다른 이유들로 거기에 뿌리를 내려 움켜쥐고 있는 식물들 아래로 거의 보이지 않는 포석들은 가장 큰 조각들로서 지구의 골격을 구성한다.
거기가 진정 사원들이다. 땅 위에 아무렇게나 올라간 건축물들이 아니라 세상에 그전에 진짜로 존재했고 옛날 영웅의 무심한 잔해들인 것이다.
이 신비로운 덩어리들을 뒤덮고 있는 숲의 어두움과 향기 사이에서 위대한 것들을 상상하는 인간은 정신으로만 그 아래에 그들의 연속성을 짐작한다.
같은 자리의 조금 더 작은 많은 덩이들이 그의 관심을 끈다. 그 신의 더러워진 손가락으로 반죽된 여러 다른 크기의 돌조각들은 시간에 의해 숲 속에 흩뿌려져 있고.
그들의 까마득한 선조의 폭발 이래로, 그리고 기력 없이 쇠잔한 하늘로 쏘아 올려진 이래로 바위들은 침묵했다.
더 이상 면도하지 않는 사람처럼 싹이 돋아 올라 침범당하고 부서지고 파헤쳐지나 움직이는 흙이 그 자리를 메워주어 어떤 반응도 보일 수 없게 된 그들 중 어느 하나도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들의 형상들과 그들의 육체에는 금이 간다. 경륜의 주름살 속에 순진함이 찾아와 깃들인다. 장미가 그들의 무릎 위에 와서 앉고 그들에게 순진한 독설을 가한다. 그래도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인다. 이전에는 엄청난 우박이 그들의 숲을 간벌해 주었고, 혼미와 체념 속에 그들의 지속은 영원하다.
그들은 주변에 수많은 꽃의 세대들, 그들의 살색보다 조금 더 생기 있는 살색을 띠고 있고, 그들의 회색만큼이나 창백하고 시든 장미색의 꽃의 세대들이 생겨났다가 스러져 가는 것을 보고 웃는다. 그들은 (말하는 수고를 하지 않으려는 입상들처럼) 이 색깔들이 지는 해의 하늘빛, 한결 더 눈부신 한 화재를 기념하여 매일 밤 시도되는 빛에서 그 색조를 빌려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 굉장한 격변의 순간에 공중에 격렬하게 내던져진 그들은 놀라운 경악으로 마감되는 한 시간의 멋진 자유를 맛보았다. 거기서부터 머지 않은 곳에, 그들의 지친 여인들의 거품 이는 노력의 가장자리에서 거인 관객의 바위투성이 무릎을 한 바다는 자신이 간직한 덩어리를 몸에 꼭 껴안고 팔 속에서 떼어내고, 껴안고, 흔들어주고, 애지중지하고, 거듭하고, 짓이기고, 쓰다듬고, 윤을 내거나, 사탕처럼 입 안 한구석에 밀어두었다가, 입에서 꺼내어, 나지막한 경사의 다정스런 가장자리에 자신의 손에 닿는 거리에 이미 많은 무리 가운데 내려놓는다. 이는 이내 그곳에서 그것을 다시 취해 한층 더 큰 애정을 가지고 정열적으로 다루기 위함이다.
그렇지만 바람이 분다. 바람은 모래를 날려보낸다. 그리고 만일 우리를 사로잡는 대상의 최후의 가장 미세한 형태인 이 입자들 중의 하나가 우리들의 눈 속에 실제로 들어가게 된다면, 돌은 자신만의 특별한 눈부시게 하는 방법을 통해 벌하고 우리들의 명상을 끝나게 한다.
오랜 명상이 거기에 쌓은 지식들이 몇몇 원칙들을 이미 그에게 제공하지 않았다면 자연은 기억의 내부로 탐구해가는 순간이 올 때 우리의 눈을 감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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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외양에서 자양분을 얻어 개념을 찾아내고 싶어하는 정신에게 자연은 돌에 관해서는, 아마도 너무 간단히, 마치 하나의 동력에 의해 움직이긴 하나 매우 불규칙한 속도로 도는 바퀴들로 이루어지는 원리를 가진 시계처럼 보인다.
식물, 동물, 기체, 액체는 죽어가고 되살아나면서 조금 빠르게 또는 덜 빠르게 돌아간다. 돌의 큰 바퀴는 우리에게는 실제로 움직이지 않는 것 같고, 비록 이론적으로라도 우리는 그것의 오랜 풍화의 단계의 한 부분만을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돌을 인간의 눈에 지속과 무감동의 상징으로 삼는 일반적 의견과는 반대로, 돌이 실제 자연 속에서는 스스로를 다시 형성해 나가지 않고, 끊임없이 죽어가는 유일한 사물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계속적으로 생명을 받아들이는 존재의 입을 통해서, 그리고 상당히 짧은 기탁 기간 동안 돌이 자신이 깃들이고 있는 장식의 파괴할 수 없는 단단함을 부러워한다고 믿게 할 때라도 실제로 그 돌은 이 장식의 계속되는 풍화에 동참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그에게 드라마틱해 보이는 행동의 통일성이 있다. 돌은 스스로 영원히 부활할 수 있다고 느끼면서도 그의 지주가 어느 날 없어질 수 있다고 혼돈스레 생각한다. 살아 움직이기를 포기하고 폐허로 변할 것만을 생각하는 장식 속에서 그 생명은 부활만을 생각하며 염려하고 불안해한다.
돌 자체가 때로 불안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조약돌, 자갈, 모래, 먼지의 돌의 마지막 상태 때에, 돌은 용기의 역할, 생명이 있는 사물들의 지주 역할을 더 이상 할 수 없다. 근원적 덩어리로부터 떨어져 나와 돌은 구르고, 나르고, 지면에 자신의 자리를 요구하고, 일생 동안 절망의 광란이 그를 흩었다가 다시 모으는 넓은 언덕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간다.
모두 돌의 진화의 어느 상태를 표현하는 그 모든 형태들이 동시에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매우 중요한 원칙으로 지적한다. 여기에는 세대들도 없고, 멸종된 것들도 없다. 사원들, 반신(半神)들, 경이들, 맘모스들, 영웅들, 선조들이 매일 그들의 손자들과 이웃한다. 인간은 자기 정원에서 이 세상의 모든 가능성을 직접 만져볼 수 있다. 개념은 없고 모든 것이 존재한다. 또는 차라리 천국에서처럼 모든 개념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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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좀더 주의깊게 돌의 특이한 형태들 가운데 하나를 검사하기를 원한다면, 그 형태의 완전성과 내가 쥘 수 있고 내 손에서 뒤집을 수 있다는 사실이 조약돌을 선택하게 한다.
또한 조약돌은 바로 개체의 시대, 개인의 시대, 즉 말의 시대가 시작하는 시기의 돌이다.
그가 직접 유래하는 바위층과 비교했을 때, 조약돌은 이미 조각난 돌이며, 거의 비슷한 수많은 사람들로 갈고 닦인 돌이다. 한결 작은 자갈과 비교했을 때, 조약돌은 인간이 그것을 실용화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발견되는 장소에 의해, 야생적인 돌이며, 적어도 길이 든 돌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의 실용적인 질서 속에서는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하는 채 남아 있는 며칠 동안이라도, 이 이점을 살리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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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수많은 물결 중의 하나에 의해 운반된 조약돌, 그 후 물결들은 빈 화물을 부리는 소리만 내고 있는데, 조약돌은 그의 과거의 형태 더미와 미래의 형태 더미 위에 쉬고 있다.
풀이 난 땅이 그의 오랜 선조들을 아직 덮고 있는 장소에서 머지않은 곳에, 그의 바로 위 부모들의 사랑의 행위가 벌어지는 바위덩이 아래에 그는 같은 것들의 낱알로 형성되어 있는 땅, 토목장이 물결이 그를 찾고 그를 잃어버리는 곳에 자신의 보금자리를 틀고 있다.
그러나 바다가 일상적으로 쫓아보내는 이 장소들은 공인 받기에 가장 부적합한 장소들이다. 그 인구들은 그 지역만 알고 있는 가운데 그 곳에 산다. 각자는 그 곳에서 잊혀졌다고 여긴다. 왜냐면 그는 번호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자기를 고려해주기에는 너무 맹목적인 힘들만을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래서, 그런 무리가 쉬는 곳 어디에서나, 그들은 실제로 모든 바닥을 덮고 있으며, 그들의 등은 발을 딛기에 그리고 정신을 딛기에 불편한 바닥을 형성한다.
새도 없다. 그들 사이로 풀잎이 삐죽 나온다. 도마뱀들이 그들을 헤집고 다니고, 함부로 돌아다닌다. 메뚜기들은 팔짝팔짝 뛰면서 조약돌들을 재기보다는 서로들을 재어본다. 인간들은 때로 그들 중의 하나를 멀찌감치 집어던진다.
그러나 마지막 조금 남은 이 대상들은, 마른 풀들, 해초들, 낡은 병 뚜껑들, 인간의 생필품의 온갖 쓰레기들로 인해 손상된 고독의 한복판에서 무질서하게 버려진 채, 대기의 엄청난 소용돌이 가운데서도 꼼짝 않고 있으면서, 맹목적으로 숨을 헐떡이며 모든 이성을 저버리고 모든 것을 쫓아가는 이 힘들의 광경에 말없이 참관하고 있다.
어디에도 매이지 않았지만, 그들은 그 지역 어느 곳엔가에 남아 있다. 나무를 뿌리채 뽑아내고 건물을 파괴할 만큼 힘센 바랍도 조약돌을 옮길 수는 없다. 그러나 바람이 주변의 먼지를 날려보내기 때문에, 때로는 태풍의 손길이 수세기 전부터 모래의 두텁고 한시적인 층 아래의 어느 한 자리로부터 우연히 그 돌들 중의 하나를 파내기도 한다.
그러나 반면에 미끌미끌하게 하고, 자신이 완전히 감쌀 수 있는 모든 것에 액체의 성격을 전파하는 물은 때때로 조약돌들을 유혹하고 끌어당긴다. 왜냐하면 조약돌은 무정형의 돌의 괴물 위에 가해진 무정형의 이 괴물의 노력으로 그가 태어났다는 것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개체는 아직도 액체가 수차례 발라져야만 완성될 수 있기 때문에, 조약돌은 본래 영원히 물에는 유순하다.
밤에 비해 낮이 밋밋하듯이 땅에서는 밋밋한 조약돌을 파도가 다시 뒤덮는 순간, 물은 그를 반짝이게 한다. 그리고 물이 내부에 작용할 수 없지만, 그리고 매우 섬세하고 밀집된 돌덩이를 가까스로 침투할 뿐이지만, 액체의 매우 활발하나 가냘플 접착성은 돌의 표면에 눈에 띄는 변화를 야기한다. 물이 돌을 다시 윤을 내고, 그들의 이전의 사랑으로 입은 상처들에 붕대를 감아주는 것 같다. 그래서 잠시 조약돌의 외면은 그 내면과 닮는다--조약돌은 그 육체 위에 젊음의 눈을 가진다.
그렇지만 완전에 이른 그의 형태는 두 가지 환경을 견딘다. 그 형태는 바다의 무질서 속에서는 태연자약하다. 그러나 물에서 나올 때는 좀더 작아져서, 그러나 흠 없이 나온다. 그리고 또한 크게라고 말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돌의 크기는 양으로 결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에서 나온 조약돌은 이내 마른다. 그에게 가해졌던 엄청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액체의 흔적은 그 표면에 남을 수 없다. 조약돌은 아무런 수고 없이 그 흔적을 날려버린다.
마침내 매일매일 조금씩 적어지나 늘 자신의 형태에 대해 자신만만하고, 맹목적이고, 단단하고, 메마른 내면의 조약돌의 성격은 그래서 뒤섞이게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물로 자신을 줄여나가는 것이다. 또한 굴복하여 모래가 되었을 때에도 물은 먼지에 파고들 듯 모래에 파고들지는 않는다. 모래 위에 다른 것들이 새겨놓는 흔적들을 지우는데 머무는 액체의 흔적을 제외하고 모든 흔적들을 간직하면서, 모래는 모래를 가지고 진흙을 만들 수 없어 그 깊이 속에서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온 바다가 그 사이로 지나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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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더 이상은 말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기호들의 사라짐에 대한 이 생각은 너무 말에 의존하는 문체의 결점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다만 시작으로 조약돌을 선택해서 너무 행복할 뿐. 왜냐하면 현명한 사람이라면 미소짓지 않을 수 없을 것이나, 나의 비평가들이 "돌에 대한 묘사를 쓰려고 시도해놓고, 그는 스스로를 옭매고 말았다"고 말할 때 그는 충격을 받을 것이다.
ㅡ프랑시스 퐁주
§
하이데거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죠. 신전을 만드는 재료가 아닌 돌로 인해 만들어진 저 詩의 신전은 무어라 말해야 좋을까요.
프랑시스 퐁주가 제시한 돌을 보고 돌 하나가 구성하는 우주를 생각하며 아득했습니다.
프란시스 퐁주는 다른 시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시인은 결코 사고를 제시해서는 안되고 대상을 제시하여야만 한다. 다시 말하면 사고조차도 대상의 모습을 띠도록 해야 한다.
시는 특별히 인간을 위해 만들어져 놓인, 인간에게 제시되는 즐김의 대상이다. 이러한 의도를 시인은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
김민정 시인과 프랑시스 퐁주가 말하는 돌, 그 방식은 돌 만큼 많은 다양성에 해당될 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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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을 꿈꾸지만 불멸할 수 없다는 걸 아는 형태와 상태...
시인들이 말하는 돌보다 돌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해야 내 말도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에 갑자기 뚝.